조선 전기 건국

  • May 22, 1392

    조선건국

    이성계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습니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막을 내리고 이성계가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것입니다. 이성계는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한것이라고합니다. (우리 선생님 말씀으로는 원래는 고조선의 이름은 조선이였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새울때 역사를 보니 같은 이름이있어서 조선에 고 (옛고)를 붙여 고조선이라고 한것이라고 합니다.)
  • Oct 28, 1394

    한양을 수도로 선정

    한양이 수도 선정이유 .
    * 한반도의 중심이기에 .
    * 한강이있어 물을 길으기에 편리하기에
    * 교통이 편리하기에
    * 산으로 둘러쌓여있어서 적을 침입을 막을수 있어서
  • Sep 1, 1395

    경복궁 완공

  • Jan 1, 1402

    호패법 실시

    원래 호패법은 호구(戶口)의 파악, 유민(流民) 방지, 각종 국역(國役)의 안정적인 조달을 위해 시행되었다. 이 호패법은 태종 13년(1413)에 처음 실시된 이래 세조 5년(1459), 광해군 2년(1610), 인조 4년(1626), 그리고 숙종 1년(1675)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인조 대까지의 호패법은 시행 후 얼마 되지 않아 폐지되어 지속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고, 숙종 대에 이르러야 호패법이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이처럼 호패법이 지속적으로 시행되지 못한 것은 각종 국역을 부담하는 양인들의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양인들은 호패의 착용이 각종 국역의 부담이 가중되는 것으로 여겨 세력가의 노비로 자신을 위탁하였다. 그 결과 국역을 부담하는 양인의 수가 줄어드는 상황에 이르렀다.
  • Jan 1, 1434

    해시계, 물시계 제작

    누각이라는 물시계가 신라 성덕왕 17년인 718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물시계를 전담하는 부서인 누각전(漏刻典)이 설치되어 박사 6명, 사(史) 1명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671년 백제의 천문학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물시계의 제작을 지도했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훨씬 전부터 물시계가 만들어져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시간 측정제도는 고려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을 것이나 전하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 Jan 1, 1443

    훈민정음 창제

    훈민정음의 기본적인 창제 이유는 일반 농민들과 같은 하급 백성들은 엄청난 양의 한자를 다 왜우지 못했고 한자가 표의 문자(뜻을 나타내는 문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어려움을 가지고 있고 또 소리는 따로 읽어야 했습니다. 이를 세아려 세종은 집헌전을 구성하여 학자들에게 새로운 글을 만들도록 명하였고 그 글자의 제목을 훈민정음으로 지은것이죠. 우선 훈민정음은 발음 하기 쉽도록 한국인의 입모양을 조사하였고 그 입모양의 모양을 따 모음을 창제 하였습니다. 표음문자(소리를 나타내는 문자)이기 때문에 따로 음을 만들 필요도 적고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여 낱말을 만들면 거이 무한한 글자를 만들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이유입니다. 이덕에 책을 많이 읽어 안질을 심하게 앓으셔서 시력도 상당량 잃으시고 몸도 많이 편잖으셨다고 하네요. 이렇게 집헌전 학자와 세종대왕께서 정성으로 만든 글을 사랑하고 아껴야 겠지요.
  • 임진왜란 발발

    선조 25년(1592)부터 선조 31년(1598)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선조 30년(1597)의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이라고 한다. 조선 정부에서는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장악하는 비변사(備邊司)라는 합좌기관(合坐機關)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으나 선조 때에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질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정세를 명(明)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 병자호란 발발

    인조는 친명배금정책을 썼습니다. 즉 명나라를 섬기고 후금을 멸시한다는 뜻이죠. 그러나 이때 명나라는 망하기 직전이었고, 후금은 중국 대부분의 영토를 차치하고 세력을 키워나가는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이때 집권세력이 서인들이었는데 서인들은 끝까지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쳤습니다. 청나라가 조선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고 군신의 맹약을 하자고 독촉합니다. 그러나 조선조정은 몇차례에 걸친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무시하였습니다. 그러자 청태종은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 옵니다.